기하의 어원

보통 기하(幾何)의 어원이 geometria의 geo-의 중국식 음차인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도쿄학예대학 와타나베 준세이(渡辺純成)의 논문[1]이 있어 읽고 요약해보았다. 해당 논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기존의 설을 반박하고 있다.

  • 음운론적 반박. 해당 단어가 중국에 전해진건 1607년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가 유클리드의 원론을 번역한 기하원본幾何原本에서 유래되었다. 근세 북방 중국어에선 연구개폐쇄음 [k]나 치경파찰음 [ts]가 모음 [i]와 결합하면 치경구개파찰음 [ʨ]이 되었고 幾도 그 케이스에 해당되긴 하지만,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이 단어가 전해졌다는 것. 예수회 Nicolas Trigault가 1626년에 쓴 서유이목자(西儒耳目資)에서 幾의 자음은 格부, 모음은 衣부로 분류해 [ki]로 읽는다고 기술했다. 또한 1690년경 청의 강희제의 명에 따라 예수회에서 Ignace Pardies의 교과서 Elémens de Géométrie를 번역한 만문기하원본(満文幾何原本)에서 기하원본을 만주문자로 gi ho yuwan ben으로 썼는데, gi는 ji와 발음을 구별해서 썼다고 하는 등 당시의 북방 만주어에서는 幾를 연구개폐쇄음으로 읽었다고 추정된다고 한다. 한 편 1631년 논리학서 명리탐(明理探)에서는 geometria를 日阿黙第亜로, syllogism을 細落世欺模로 표기하고 서구학술 개설서 서학범(西学凡)에서는 logica를 落日加, theologia를 陡禄日亜로 표기했는데, 서유이목자에서 日이나 世의 자음은 연구개폐쇄음으로 분류되어있지 않았으므로, geo-를 幾로 음차했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
  • 의미적 반박.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 즈음 예수회에게 있어 幾何란 단어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10종류의 범주 중의 하나로 양(量)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서학범에서는 양을 재는 단위를 표현하는 말에 幾何가 쓰였고 mathematica를 幾何之学, 즉 幾何의 도를 고찰하는 것이란 뜻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만문기하원본에서도 기하원본을 설명하며 수의 원류란 뜻이라고 언급하는 등, 당시의 예수회는 기하란 단어를 일반적인 수학적 대상을 의미하는 뜻으로 쓴 듯하다고.

그러면 어쩌다가 현재 “기하학”이 geometry를 뜻하게 되었는가.

19세기 전반부터 중엽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중국이나 일본에 영향을 크게 끼쳤는데, 당시 등장했던 영중사전들에서 Morrison의 사전(1815-1823)에서는 양(量)으로서의 기하란 뜻을 의식해서 geometry란에 기하원본=the principles of quantity라고 언급은 하되 대응은 시키지 않았으나, Medhurst의 사전(1847-1848)에서는 기하원본=the principles of geometry라고 번역해 quantity로서의 뜻은 사라지고, Lobscheid의 사전(1866-1869)은 Medhurst를 답습해 기하와 quantity 사이의 관계가 희석되어버렸다.

즉 결론적으로, 애초에 유클리드의 원론을 기하원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는 수학적인 양(길이, 각 등등)을 따지는 학문이란 의미로 기하학이란 단어로 번역을 했는데 그것이 명말청초 예수회에서 통용되었으나, 19세기 이후 영중사전들이 편찬되는 과정에서 geometry 항목에 geometry를 다룬 책으로 기하원본이 인용되다가 조금씩 geometry를 기하로 대응하기 시작했다는 것.

일전에 zariski님이 블로그에 쓰신 을 보고 작성했던 트윗 타래를 정리. (2018/03/29)

Update (2019/01/10): 트친분으로부터 음운론적 반박은 근거가 다소 빈약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幾의 발음에 대해서만 언급이 되어있을 뿐 그 원어에 해당하는 geo-의 경우 라틴어 발음은 [g]이나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 등의 발음을 두고 옮겼다면 충분히 [k]로도 옮겨질 수 있다는 것. 후속 연구나 다른 논문을 참조해야할 것 같음.

References

[1] 渡辺純成, “満洲語資料からみた「幾何」の語源について (数学史の研究)”, 数理解析研究所講究録 (2005), 1444: 34-42 https://repository.kulib.kyoto-u.ac.jp/dspace/bitstream/2433/47614/1/1444-4.pdf

기하의 어원”의 2개의 생각

    1. 저야말로 zariski님이 알려주셔서 하나 또 배우게 되어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트친분에게서 다른 의견을 들었으니 (Update 부분)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블로그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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